유미가 들려주는 이야기
도거와 혼침의 부정적 정서 본문
부파불교인 설일체유부에서, ‘도거’와 ‘혼침’은 ‘대번뇌지법’으로 분류된다. ‘대번뇌지법’은 ‘번뇌’에 물들어 혼탁한 마음에 두루 존재하는 마음작용을 말한다. 여기에는 치(癡), 방일(放逸), 해태(懈怠), 불신(不信), 혼침(惛沈), 도거(掉擧)가 있다. 주요 논서인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에서, ‘혼침’을 “몸의 무거운 성질과 마음의 무거운 성질, 몸이 민활하지 못한 성질[不堪任性]과 마음이 민활하지 못한 성질, 몸이 혼미하거나 침울한 성질[昏沈性]과 마음이 혼미하거나 침울한 성질”이라고 자세하게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도거’는 “마음으로 하여금 고요히 안정되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설일체유부의 이론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毘婆沙論)에서 “‘무명’ 과 ‘도거’와 ‘혼침’은 번뇌이며 수행을 방해하는 작용이 강한 것”으로 보고 있다. ‘도거’와 ‘혼침’은 유식학 논서인 유가사지론에서도 ‘오개’에 속하는 것으로 정의되어 있다.
각각 ‘도거악작(掉舉惡作)’과 ‘혼침수면(惛沈睡眠)’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초기 불교경전에서 ‘혼침수면’을 ‘수면’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도거악작’을 ‘도회’로 표현된 것과 차이가 있지만, 각각 ‘마음이 둔하고 가라앉는 것’, ‘마음이 들뜨거나 불안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는 점에서 초기불교와 유식학의 정의에는 차이가 없어 보인다. 또한 세친(世親)의 유식삼십송(唯識三⼗頌)에서 ‘도거’와 ‘혼침’은 ‘수번뇌심소’로 분류되고 있기도 하다.
‘수번뇌심소’는 ‘근본번뇌’인 탐・진・치를 따라 일어나는 ‘번뇌’를 말한다. 그리고 ‘심소(⼼所)’는 ‘심왕(⼼王)’과 상응해서 나타나는 마음의 작용이다. ‘심왕’은 전오식(前五識,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과 제육의식(第六意識), 제칠말나식(第七末那識), 제팔알라야식[第⼋阿賴耶識]을 말한다. 유식 법상종(法相宗)의 논서인 성유식론(成唯識論)은 유식삼십송의 논서로서 현장(⽞奘, 602-664)과 그의 제자 규기(窺基, 632-682)가 호법(護法, 530-561)의 설을 기반으로 만든 논서이다. 여기에서 ‘도거’는 ‘심왕’을 들뜨게 하여 어수선하며 고요한 상태에 있지 못하게 하는 심리작용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혼침’은 ‘심왕’을 어둡고 답답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불안’한 상태를 의미하는 ‘도거’와 몸과 마음이 가라앉아 ‘우울’한 상태를 표현하는 ‘혼침’은 정서적인 면을 나타내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서’는 마음에 생겨나는 여러 가지 감정을 의미한다. 내적・외적 자극에 대해 느낌이나 기분으로 반응하는 양상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서’라는 말은 불교에 존재하지 않는다.
유식학에서는 말하고, 행동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작용을 분별의 작용 즉, 마음이 대상을 보고 판단하는 작용으로 본다. 여기에 집착의 작용이 가해지면서 ‘번뇌’가 생겨난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 틀 속에는 분별이라는 인지적인 면과 집착, ‘번뇌’라는 정서적인 면이 존재한다. 불교에서는 이 정서적인 장애를 ‘번뇌장’으로 그리고 인지적인 장애를 ‘소지장’으로 분류하고 있다. 서양의 정신의학에서도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은 그 경험에 대한 기억이 정리되지 않고 조각난 채 엉키고 섞여 있어서, 정서조절에 어려움이 생겨나고, 타인을 불신하게 되며, 자신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지각하기도 한다고 본다. 이 설명에는 인지적 장애인 ‘소지장’과 정서적 장애인 ‘번뇌장’의 의미가 내재해 있다. 즉 경험에 대한 기억은 인지적 측면을 말하며, 타인에 대한 불신과 같은 현상은 정서적인 면을 말하기 때문이다.